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72)

Parasite! Parasite! Parasite! Parasite!

이렇게 새로운 역사는 외쳐졌습니다.

지난주일 밤에 있었던 92회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한국영화“기생충”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 장편영화상의

수상작으로 불리면서 4관왕에 오른 것입니다.

한국 문화의 세계적인 역량(力量)을 여실(如實)히 보여준 쾌거(快擧)였습니다.

 

“니들 그러다가 하늘나라 가서 개털모자 쓰고 다닌다!”

선생님이 그러시니 천국에 정말 개털로 만든 개털모자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선생님 말씀도 안 듣고 뺀질뺀질거리다가 영원히 벗을 수 없는 개털 모자를

쓰고 천국에서 오고 가면 모양이 한참 빠질 텐데 어떻게 하나 걱정이 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어렸을 적부터 잘하라는 선생님의 뜻깊은 마음은 알았지만

천국에는 확실히 개털모자가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천국에 개털모자는 없고 그 대신 면류관은 많이 있습니다.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 썩지 않을 면류관.

이 땅에서 영화인들의 주는 아카데미 상 받고도 저렇게 좋아하는데

주님이 주시는 면류관 시상식에 여러 차례 불린다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모든 상은 수고의 결정체(結晶體)입니다.

봉준호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스태프들의 오랜 땀 흘림이 없었다면

오늘의 영광스러운 4관왕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천국 면류관을 받을 것인가? 몇 관왕이 될 것인가?

그것은 그날 갑자기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가 계속 일어납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내일 답을 주겠네. 그 대신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게.”

계속되는 문제에 휩싸인 청년이 지혜로운 어른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내일 답을 주신다고요. 감사합니다. 제게 부탁하실 일은 무엇인가요?”

“내 낙타가 50마리가 있네. 오늘 밤에 그 낙타들을 지켜보다가

모든 낙타가 무릎 꿇어 자면 자네도 잠을 자고 내일 보세.”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청년에게 묻습니다.

“그래, 잠은 잘 잤나?”

“어르신, 잠을 한 잠도 못 잤습니다.” 투덜대며 청년이 답을 합니다.

“낙타가 다 잠을 자야 할 텐데, 한 녀석이 잠을 자면 다른 녀석이 일어나고

대부분 잠들었는가 싶으면 저쪽에서 또 일어나고...

동시에 다 잠을 안자니 저도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네, 청년. 모든 낙타가 다 동시에 잠을 안 잔다네.

이 녀석이 가만히 앉아 있으며 다른 녀석이 일어난다네.

낙타가 다 잠이 들기를 기다리면 사람이 쉴 수가 없다네.

삶에는 이런저런 문제가 계속 일어난다네.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잠을 자게. 마음의 평강을 누리게.”

 

우리가 사는 세상, 문제는 계속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결코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문제의 세상 속에 평안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한 폐렴 전염병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사망자의 수와 확진자의 수가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고

두려움과 공포, 경계와 배척도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습니다.

작은 수산물시장에서 출발했다는 바이러스가 세상을 다 잡아 먹을 기세입니다.

가히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전염병인 것 같습니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던 세계보건기구(WHO)도 지난 1월 30일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非常事態)”를 선포하였습니다.

국제적인 방역, 피해지역에 대한 지원, 치료제 개발 등이 뒤따를 것입니다.

 

이 땅에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교회는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세상 사람들처럼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떨거나,

마스크를 쓰고 손을 잘 씻거나, 정부나 세계보건기구에서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으면 우리가 할 일은 다 한 것일까요?

이 땅에 전염병이 유행할 때 교회가 할 일을 하나님이 친히 일러주셨습니다.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3b-14)

 

전염병이 유행 할 때 교회가 할 일은 회개하고 겸손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번 바이러스의 근원지로 여겨지는 우한의 수산시장만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그 보다 더 무서운 미움, 거짓, 악담 같은 영적 악성 바이러스를

많이 퍼뜨렸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비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전염병이 유행하는 국제적 비상사태 속에서 교회는 두려워말고 흔들리지 말고

교회다운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고통당한 자들에게 사랑의 손을 펴는 것입니다. 


여러날 출타를 하였다가 돌아왔습니다.

출타를 할 때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짐입니다.

한정되어 있는 가방에 무엇을 넣어갈 것인지가 고민입니다.

그리고 될 수 있는대로 가볍게 짐을 가져가면 좋습니다.

저에게는 가장 가벼운 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가장 무겁습니다.

무거우면서 가벼운 짐, 무엇인지 아십니까?

책입니다.

 

책은 어떤 짐보다 무겁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많은 책이라도 들고 다닐 수 있습니다.

열권쯤은 식은 죽 먹기이고 스무권, 아니 그 이상도 끄떡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제가 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책은 제게 짐이 아닙니다.

한권 한권 보물과도 같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습니다.

매일 큰 가방에 책을 잔뜩 넣고 다녔습니다.

전도사 시절, 어느 교회 중등부 수련회를 며칠 인도하러 가면서

이민 가방을 가지고 간적이 있는데 거기에 절반 정도는 책이었습니다.

 

올해 받은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이 한가지여도 일년내내 무거운 짐이 될수 있고

여러 사명을 받았어도 가벼울 수 있습니다.

그 사명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오래전 이야기 같습니다.

2020년 제직 수련회가 끝난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벌써 다 잊으신 것은 아니시지요.

제직 수련회 때 주어진 말씀 중 어떤 말씀이 잊혀지지 않으십니까.

제겐 “엎드리면”이라는 말씀이 강력하게 남아 있습니다.

 

 엎드리면, 앞서고

 엎드리면, 사람이 안 보이고

 엎드리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엎드리면”의 축복은 놀랍습니다.

성경에는 엎드려 눈을 감고 기도하면 일어나는 일들을 이같이 말씀합니다.

 

“….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민 24:3b-4)

 

분주한 자가 아니라 엎드리는 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한가한 자가 아니라 엎드리는 자가 미래를 볼 수 있고,

달리는 자가 아니라 엎드리는 자가 최후 승리를 합니다.

 

새해에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불확실의 안개가 우리 앞에 자욱합니다.

하지만 엎드리면 하나님의 음성도 듣고, 짙은 안개 너머도 볼 수 있습니다.

엎드리면 마침내 모든 자 앞에 있게 됩니다.

엎드림의 놀라운 축복, 놓칠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인데도 공부 성적에는 차이가 꽤 있었습니다.

수우미양가(秀優美良可)로 나눠진 성적표는 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학교 때 도시락에도 다름이 있었습니다.

도시락에 계란 후라이, 진주햄 쏘세지 반찬을 가져온 친구는 늘 부러웠습니다.

고등학교 때 확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생긴 것도, 성격도, 취미도, 또 진로에 대한 생각도 다 다르다는 것을.

 

그런데 그 모든 차이를 잊게 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다양한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걸을 때였습니다.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걸을 때는 어떤 차이도 느껴지지 않았고,

세상의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 됨과 용기를 가져다주었던 어깨동무 친구들이 그립습니다.

 

어깨동무는 한국인의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디언들에게도 그와 유사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뒤에서 걷지 말라. 나는 그대를 이끌고 싶지 않다.

 내 앞에서 걷지 말라. 나는 그대를 따르고 싶지 않다.

 다만 내 옆에서 걸으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겐 서로의 어깨가 필요합니다.

외롭기에.

힘들기에.

서럽기에.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신 주님과

서로 사랑하라고 모아주신 교우들과 2020년, 함께 걸어요.

그 옛날,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걸었던 것처럼 함께 걸어요.


그 당시엔 있었죠. 동네 곳곳에 큰 공터가.

그 동네 빈 공터에 이삼일 뚝딱거리면 큰 텐트가 세워집니다.

이제 곧 있을 서커스 공연을 홍보하는 쿵작거림이 온 동네를 몇 차례 돕니다.

아버지를 졸라 들어간 서커스 공연이 드디어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분장한 사람들이 나와 재미있는 말과 행동을 보여주다가 점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연을 이어갑니다.

그 중에 압권은 공중돌기입니다.

몇 바퀴를 도는 공중돌기 묘기를 보이는 사람은 영웅과도 같았습니다.

훗날, 아주 훗날에 알게 되었습니다.

공중돌기에서 진정한 영웅은 도는 사람이 아니라 그를 붙잡는 사람이라는 것을.

붙잡아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런 공연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공중 도는 사람은 붙잡아 주는 사람을 신뢰하며 휙휙 도는 것입니다.

 

“네 손 잡아 주리라”

우리 손을 붙잡아 주시겠다는 분이 계십니다.

벌벌 떨다 아무 것도 못한다 하면서 한 해를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놀라운 묘기(?)를 보이며 한 해를 사시겠습니까?

이 말씀을 품고 공중 높이 솟구쳐 휙휙 날아도 됩니다.

공중 도는 우리 손을 실수 없이 붙잡아 주시겠다는 그 분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결론은 나중에 냅시다.”

이런 말이 잦으면 그 누구도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결론을 미룰 수도 없습니다.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데 올해의 결론을 어떻게 미룬단 말입니까?

 

올해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은혜입니다.

봄의 은혜, 여름의 은혜, 가을의 은혜, 겨울의 은혜가 다 달랐고 넘쳤습니다.

고난도 은혜, 평안도 은혜였습니다. 약함도 은혜, 강함도 은혜였습니다.

 

올해의 또 다른 결론은 이것입니다.

감사입니다.

고맙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가슴이 뭉클한 시간, 눈시울이 붉어진 시간, 콧잔등이 시큰한 시간.

우리 교역자, 우리 장로님, 우리 성도들이 만들어 주신 감사의 시간이었습니다.

 

올해의 결론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준비입니다.

올해 찾아온 여러분의 죽음.

가족들도 사랑하고 우리 모두도 사랑하던 분들.

올 한 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우리 곁을 떠나면서 들려준 외침.

“준비하라. 준비하라. 준비하라. 하나님 만나기를.”

 

그렇습니다. 은혜, 감사, 준비는 미룰 수 없는 올해의 세 가지 결론입니다.


사실, 저도 꿈꾸었었죠. 크리스마스에 눈이 와서 온 세상이 하얗게 되기를.

그래서 이 감미로운 노래를 좋아하곤 했답니다.

i’m dreaming of a white christmas....

그러나 성탄절을 하얀 눈과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혹시, 가보셨나요.

성탄절 전후로 록펠러 센터 앞으로.

크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번쩍이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아무리 멋있어도 크리스마스트리로 성탄절을 바꿀 수 없지요.

 

간혹, 참여해 보셨나요.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에.

딸랑딸랑 종소리를 좇아가 이웃을 돕는 마음을 담는 것은 좋습니다.

그래도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성탄절을 바꾸는 것은 아니랍니다.

 

많이, 기쁘셨나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서.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준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정말로 성탄절을 선물을 주고받는 계절로 바꾸자고 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비장(悲壯)한 날입니다.

성탄절은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내가 꼭 안아야하는 날입니다.

성탄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전무후무(前無後無) 날입니다.

성탄절은 구원이라는 인류 최대의 소망(所望)이 임한 날입니다.

 

엿 장수 맘대로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고귀한 성탄절을 엿 장수가 맘대로 엿을 바꾸어 주듯 더 이상 다른 것과 함부로 바꾸지 말아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 모두에게는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있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1954년,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시골 작은 교회의 젊은 목사님 부부가 낡은 교회의 이곳저곳을 고치며 성탄을 준비하고 있는데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센 바람이 그 마을을 휘몰아치면서 교회의 강단 뒷벽에 큰 구멍을 내었습니다.

목사님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시장에서 아주 싼 가격에 오래된 금빛과 아이보리색의 레이스를 가진 테이블 덮개를 샀습니다.

덮개로 강단 뒷벽의 큰 구멍을 잘 덮을 수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성탄절 이브 예배가 있는데, 그날 낮 젊은 목사님은 교회 앞 추운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나이 든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버스가 오려면 멀었으니 교회에 들어와 계시라고 했습니다.

그 마을에 일자리 인터뷰를 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교회 안에 들어온 여인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강대 뒤에 걸려 있는 테이블 덮개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이건 내 것입니다.

예전에 내 남편이 나를 위해 만들어 준 것이지요.

전쟁 때에 남편과 헤어졌는데 훗날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 테이블 덮개를 가져가라는 목사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 여인은 떠났습니다.

 

그 날 저녁 성탄 이브 예배를 마친 후 나이 든 마을 남자가 목사님에게 다가와 “저 강대상 앞에 걸려 있는 것은 아내를 위해 내가 만들었던 것입니다.

전쟁 때 헤어졌는데 이제는 하나님 품에 안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로 죽은 줄 알았던 부부는 살아 있었고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탄의 이야기는 언제나 소망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오후, 헨델의 성탄 이야기를 꼭 들으러 가요.

그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꾼 이야기, 그가 만난 메시아 이야기는 우리 찬양대의 찬양으로 아름답게 펼쳐질 것이랍니다.


 

그 날이 있습니다.

그 날, 뭔가 좋은 결과를 얻는 사람들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시상대 위에서 상 받는 그 날의 모습을 그리며 연습했고, 근육이 살아(?) 있는 사람들은 건강한 그 날을 상상하며 운동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있습니다.

이후에 주님 뵈올 날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맡긴 일은 어떻게 하였느냐?”

아무도 숨김없이 대답해야 할 그 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그 날이 있습니다.

긴 훈련의 시간을 묵묵히 감당하고 오늘 귀한 임직감사예배를 드리는 임직자들이여, 축하도 드리지만 오늘 직분을 맡긴 그분 앞에서 결산할 날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날이 있습니다.

지난 일 년도 함께 걸어오며 울고 웃었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회계(會計)의 그날이 회개(悔改)의 그 날이 아니라 상 받는 그 날이 되도록 오늘도 아름다운 수고와 동행을 멈추지 말아요.    


“마이 달링”이란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my darling (나의 사랑)

can i call you darling (내가 당신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darling darling darling (사랑, 사랑, 사랑)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저의 칼럼 제목은“마이 달링”이 아닙니다.

“마이 달랑”입니다.

달랑 한 장 남은, 나의 달력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매월 초(初) 하나하나 내 손에 의해 아프게 뜯겨져 나간 달력들.

주어진 한 달에 대한 부끄러움은커녕 대단한 한 달을 산 것 마냥 그것을 교만히 뜯곤 했던 내가, 마지막 달랑 남은 달력 앞에 겸손히(?) 서 있습니다.

여유(餘裕)는 사라지고 초조(焦燥)가 깃든 달랑 한 장 남은 달력 앞입니다.

한껏 가벼워진 한 장 달력이 한 해의 마지막이라는 부담으로 매우 무겁게 보입니다.

 

미안하오. 2019년 달력들이여.

지금까지 열한 장의 그대들에게 매우 무례했음을 고백하오.

이제라도 마지막 한 장 달랑 남은 당신을 진심으로 존중하며 사랑하겠소.

마이 달랑, 마이 달링이여!


10가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두 아들 장례식에서 10가지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가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전도하다 순교당했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7가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신앙의 자유를 찾았던 청교도들이 혹독한 어려움 가운데 7가지 감사를 드렸습니다.

 

80톤 밖에 안 되는 작은 배였지만 그런 배라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감사합니다.

폭풍으로 돛이 부러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감사합니다.

.....

고통스러운 삼 개월 항해 중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었음을 감사합니다.

 

그들은 극심한 고통의 자리에서도 감사에 감사, 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넘어서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았기에 그토록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들이었다면 몇 가지를 감사할 수 있을지 스스로 궁금합니다.


내일 모레가 11월 19일, 오는 목요일이 21일이네요.

11월 19일 케이프코트만(灣) 경유(經由), 11월 21일 프로린스타운에 입항(入港).

1602년 9월 16일 영국 잉글랜드 항구도시 프리머스에서 102명의 청교도를 태우고 출발했던 배가 미국 땅에 다다르던 날자와 장소 입니다.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 fathers)이라고 일컫는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 앞에는 바다의 파도부터 시작하여 온갖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는 이듬해 봄에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그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결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역경 앞에 그들이 외쳤던 말은“힘들다, 죽겠다”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였습니다.

감사는 어떤 역경도 이깁니다.

역경 중의 감사가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습니다.

탱큐, pilgrim fathers!


연말이 점점 가까워오며 바쁜 일들은 더 몰려오지만 문득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한 해를 어떤 걸음을 걸었는가....

모든 걸음에는 발자국이 남는데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가....

남긴 발자국을 뒤돌아 볼 자신이 없었지만 살짝 돌아보았습니다.

 

한 동안 머뭇거린 발자국, 샛길로 갔다 온 발자국, 거기서 쓰러졌던 것이 분명한 작은 발자국을 덮은 큰 몸 자국, 그래도 다시 일어나 걷고 또 걸어온 발자국.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조선 시대의 이양연 문인이 지은 시(詩)입니다.

짧은 시가 나의 발자국은 나의 것만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되돌아가 그 발자국을 지우고 싶지만, 그리고 다시 반듯하게 걸은 발자국을 남기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다시 걸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이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발자국, 뒷사람이 따라오다가 실망하지 않을 나의 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이제 막 들어선 11월도 빨리 지나가겠죠.

오래 붙잡고 싶어도 뿌리치듯 달아날 11월이 분명합니다.

부질없이 가지 말라고 말하기 보단 지나가는 11월을 수채화로 그려 내 마음의 벽장에 오래 걸어 두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흙색 물감으로 한창 땅을 파고 있는 새정전 앞마당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웬일이죠? 제 눈에 뭐가 꼈나요?

그 마당의 흙색이 가을 단풍마냥 형형색깔로 보여요.

붉은 김치색, 노란 튀김색.... 지난 10월 건축바자에서 봤던 수십가지 색상들이 앞마당 흙색깔에 섞여 있어요.

 

그토록 어려운 이민 땅에서 본당과 교육관을 묵묵히 세우시더니만 건너편 새성전을 함께 지어가시는 교우들을 생각하니 11월의 수채화는 물감으로 도화지에 그려지기 전에 제 얼굴에 눈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제 눈의 눈물은 말라도 결코 마르지 않을 사랑의 물감을 각양각색으로 뿜어내는 성도들 때문에 앞마당 흙색은 화려한 색깔이 되어 놀라운 11월의 수채화를 그리게 될 것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아버지가 많이 기다리셨어요.

오시기까지 힘드신 일이 한둘 아니셨죠?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기고 아버지 집으로 오셨으니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며 우리의 길고 긴 아픈 이야기도 들어주시고 우리의 깊고 깊은 상처도 만져 주실 것입니다.

 

처음이어서 낯설고 오랜만이어서 어색해도 들여다만 보시고 지나가지 마세요.

여기가 아버지 집, 곧 당신의 집이랍니다.

 

가장 아픈 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고독(孤獨)이라는 병이 가장 아픈 것 같아요.

제겐 울 일이 적지 않은데 같이 울어줄 사람이 없고 제겐 웃을 일이 많은데 같이 웃어줄 사람이 없다면 못 견딜 것 같아요.

 

곧 윙윙 찬바람이 불고 펑펑 함박눈이 쏟아질 추운 겨울이 올 텐데,

또다시 그 겨울을 외롭게 지내지 마세요.

“겨울 속의 고독!”생각만 해도 너무 시리고 슬프지 않나요.

“아버지 집에서 함께!”생각만 해도 너무 따뜻하고 기쁘지 않나요.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모두의 아버지 집으로, 정말 잘 오셨습니다.


많이 바쁘시지요?

그래도 질문해야 합니다. 가을에는 질문해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가을이 오면 이렇게 물어보겠다고 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이 가을, 우리는 지금 어떤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까?

행복에의 초대를 앞두고 우리에겐 이런 질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에?”

 

그 사람의 물리적 위치를 넘어 영적인 자리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 부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 배우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 자녀는, 내 형제는, 내 친구는, 내 이웃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확실히 천국 가는 길을 걷고 있는지, 지옥의 나락(奈落)인지.

아무리 봐도 전자(前者)가 아니라 후자(後者)라면

이 가을 펼쳐지는 행복에의 초대는 그를 위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많이 슬픈데도 아름다운 아픔이 있습니다.

가슴앓이입니다.

가슴앓이해 보셨지요?

사랑하는 자가 몸이 아플 때 가슴앓이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너무 그리울 때 가슴앓이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시름시름 가슴앓이할 때도 가슴이 시리고 아픕니다.

 

한국에서 운전면허 시험을 2년 넘게 보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면허시험장을 찾던 할머니에게 직원이 왜 그렇게 운전면허를 따고 싶어 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용달차를 몰며 배달하던 아들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못 쓰게 되었는데 운전을 배워 그 아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답변을 하셨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노(老) 어머니의 가슴앓이는 더 이상 가슴만 쓸어내리지 않고 운전면허를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를 갖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식은 것이 있습니다. 굳은 것이 있습니다.

아예 잃어버리고도 찾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가슴앓이입니다.

나에겐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없다는 듯이 가슴앓이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찾아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 사랑을 찾기까지 얼마나 가슴앓이하실까요.

이 가을에 펼쳐질 행복에의 초대를 예수님의 가슴앓이를 내 아픔으로 삼고 참여한다면 쉽게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가 불같이 일어날 것입니다.


벌써 10월입니다.

가을의 깊은 향취(香臭)가 반가우면서도 뭔가 초조한 시간입니다.

올해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보니 화들짝 놀랄 시간인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되지”하면서도 올해도 연초의 결심을 적당히 포기하고 싶기도 합니다.

스스로 궁금합니다.“결심”은 강한데“뒷심”은 왜 이리 약(弱)한 지?

 

약한“뒷심”탓을 하며 남은 두어 달을 보내려 하는데 다가온 글자가 있었습니다.

again!

“다시”라는 글자가 선명히 제게 다가온 것입니다.

얼마 전“다시 복음 앞에”라는 복음 성가를 들었습니다.

 

많은 이들 말하고 많은 이들 노래는 하지만 정작 가진 않는 길

두려운 생각보다 많이 힘들고 험한 길 보단 그저 말로만 가려기에

점점 멀어져만 가네 내게 생명 주었던 그 길

점점 이용하려 하네 내게 사랑 주었던 그 길

다시 복음 앞에 내 영혼 서네 주님 만난 그때

나 다시 돌아가 주님께 예배드리며

다시 십자가의 길 걸으리

 

다시, 다시, 다시로 이어지는 단어가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도 어려운 가운데 다시 일어 난 많은 교우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10월 마지막 주일 있을 “행복에의 초대”주제를“again”으로 정했습니다.

우리도 다시 일어나 연초(年初)의 결심을 이루고, 장결자들도 다시 일어나 주님 품 안으로 돌아오고, 불신자들이 다시 일어나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렇습니다.

“again”이라는 단어는 모두에게“희망”이라고 읽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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